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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에서 기름값 영수증을 보며 "왜 이렇게 비싸지?"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비싼 기름이 오히려 우리나라 수출 신기록의 숨은 공신이었습니다. 올해 누적 수출액이 7094억달러를 돌파하며 지난해 연간 최고 기록을 무려 117일 앞당겨 넘어섰다는 뉴스를 보고, 저는 반도체보다 석유제품 숫자를 먼저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그림이 보였습니다.

석유제품이 수출 3위라고? 반도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뉴스 헤드라인만 봤을 때는 당연히 반도체 이야기겠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품목별 수출 데이터를 뜯어보니, 올해 1~8월 석유제품 수출액이 426억달러로 승용차를 제치고 전체 수출 품목 3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같은 기간 전년 대비 40.7% 증가한 수치입니다.
반도체 증가율이 169.6%이니 절대적인 비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도체가 전체 수출 규모를 폭발적으로 키운 엔진이라면, 석유제품은 그 옆에서 묵묵히 받침대 역할을 한 셈입니다. 8월 한 달만 해도 석유제품 수출이 68억4000만달러로 월간 역대 최고를 찍었으니, 단순한 반짝 성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숫자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실력인가, 운인가"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였습니다. 세계 5위 수준인 국내 정유 4사의 하루 원유 정제 능력 약 330만배럴이 실력이라면, 두 개의 전쟁이 만들어낸 공급 공백은 그 실력이 빛날 무대가 된 셈이니까요.
- 올해 1~8월 석유제품 수출액: 426억달러 (전년 동기 대비 +40.7%)
- 8월 월간 석유제품 수출: 68억4000만달러 — 월간 기준 역대 최고
- 국내 정유 4사 하루 원유 정제 능력: 약 330만배럴 (세계 5위 수준)
- 올해 누적 수출액 7094억달러 — 지난해 연간 최고(7093억달러)를 117일 앞당겨 돌파 (출처: 경향신문)
두 개의 전쟁과 정제마진, 한국 정유사에 어떤 기회가 생겼나
제 경험상 경제 뉴스에서 "전쟁이 호재"라는 구도가 나오면 항상 불편한 감정이 먼저 올라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구조를 제대로 이해해야 앞으로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먼저 중동입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중동 정유시설 처리량이 올해 2월 하루 990만배럴에서 8월에는 730만배럴로 줄었습니다. 26.2% 감소입니다. 여기서 정유시설 처리량이란 원유를 받아들여 실제 석유제품으로 가공하는 양을 뜻합니다. 이 수치가 줄면 시장에 풀리는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의 물량이 그만큼 감소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처: Bloomberg).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경유 공급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세계 2위 경유 공급국인 러시아의 정유시설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을 받아 가동을 멈췄고, 러시아 정부는 경유 수출 제한 조치까지 내렸습니다. 이 두 가지 충격이 겹치며 국제 석유제품 시장에 심각한 공백이 생겼습니다.
이 공백을 파고든 것이 한국 정유사들입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정제마진(Crack Spread)입니다. 정제마진이란 원유를 구입한 가격과 이를 정제해 만든 석유제품을 판매한 가격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정유사의 실질 수익성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한국의 경유 수출단가는 올해 2월 배럴당 90.9달러에서 7월에는 138.6달러까지 급등했습니다. 같은 양을 팔아도 수익이 53% 가까이 늘어난 구조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놀랐던 건 유럽에서 한국산 경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유럽까지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1만9000km 이상을 항해해야 합니다. 운송비만 따지면 도저히 경쟁이 안 될 거리인데, 그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한국산을 찾았다는 건 그만큼 다른 공급처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수출규제를 풀어야 할까 — 정부와 정유업계, 누구 말이 맞을까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생깁니다. 수출 기회가 이렇게 좋은데 왜 마음껏 팔지 못하는 걸까요? 사실 저도 처음엔 "왜 정부가 막는 거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정부 입장도 무작정 틀렸다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정부는 중동 사태 이후 휘발유, 경유, 등유 등 석유제품을 수출 통제 품목으로 묶어 수출 물량을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내 수급 안정과 에너지 안보를 명분으로 한 조치입니다. 에너지 안보(Energy Security)란 국민 생활과 산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공급하는 국가의 능력을 말합니다. 전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내 물량이 갑자기 부족해지면 주유소 가격이 폭등하거나 물류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반면 정유업계의 주장도 납득이 갑니다. 원유 수입처를 다변화해 수급에 문제가 없고, 국내 공급 물량보다 많은 재고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출을 막는 건 기회를 버리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제 경험상 기업 입장에서 "지금 팔면 되는데 규제 때문에 못 판다"는 상황은 굉장히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느 한쪽이 100%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전쟁이라는 변수는 하루아침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남아도는 재고가 내일은 부족해질 수도 있는 게 에너지 시장입니다. 다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조건 동결"이라는 방식보다는 국내 재고 지수와 수급 상황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탄력적 수출 관리 체계가 현실적인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가 목표로 하는 연간 수출 1조달러 달성을 위해서도 석유제품이 제 몫을 해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우리나라 석유제품 수출이 갑자기 늘어난 진짜 이유가 뭔가요?
A. 중동 분쟁으로 정유시설 처리량이 26% 넘게 줄고, 러시아도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 가동이 차질을 빚으면서 국제 시장에 석유제품 공급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 틈을 세계 5위 수준의 정제 능력을 갖춘 한국 정유사들이 파고든 구조입니다. 실력과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Q. 정제마진이 뭔지 쉽게 설명해줄 수 있나요?
A. 정제마진이란 원유를 사들인 가격과 이를 가공해 만든 석유제품(휘발유, 경유 등)을 판매한 가격 사이의 차액입니다. 쉽게 말해 정유사가 원유 1배럴을 정제해서 남기는 수익입니다. 올해 한국 경유 수출단가가 2월 배럴당 90.9달러에서 7월 138.6달러로 급등하면서 정제마진도 크게 개선됐습니다.
Q. 정부가 석유제품 수출을 제한하면 소비자한테는 좋은 건가요?
A. 단기적으로는 국내 공급 물량이 유지되어 주유소 기름값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석유제품 가격이 오르면 물류비, 운송비가 연쇄적으로 상승해 생활 물가 전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 수출 제한이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수익성과 수출 경쟁력을 어떻게 균형 있게 유지할지가 더 큰 숙제입니다.
Q. 우리나라가 연간 수출 1조달러를 달성하려면 석유제품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A. 반도체처럼 단일 품목이 폭발적으로 기여하기는 어렵지만, 석유제품은 현재 수출 3위 품목으로 자동차·선박·통신기기와 함께 전체 수출 파이를 고르게 떠받치는 역할을 합니다. 1조달러라는 목표는 특정 품목 하나가 아니라 여러 산업이 동시에 성장할 때 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에 석유제품의 기여가 실질적으로 중요합니다.
결론
이번 뉴스를 추적하면서 제가 확인한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국 정유업계가 세계적인 정제 능력이라는 단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실력이 빛을 발한 배경에 전쟁이라는 불행한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사이익이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수출 호조를 마냥 반가워하기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국 석유제품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출규제 문제도 결국 그 큰 그림 안에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국내 수급 지표를 근거로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체계가 갖춰진다면, 소비자 보호와 수출 경쟁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