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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 이 뉴스를 봤을 때는 "프린터 회사가 로봇 사업을 한다고?" 정도로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이코 엡손이 발표한 장기 비전 '엔지니어드 퓨처 2035'의 내용을 하나씩 읽어보니 단순한 사업 다각화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산업용 사업 매출 비중을 현재 33%에서 2035년 5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 그리고 이익 기여도를 45%에서 70%로 높이겠다는 구조 전환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이 뉴스를 계속 들여다보게 된 이유는 숫자보다 그 배경에 있었습니다.

사업구조를 바꾸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제가 직접 기업 분석 글을 써오면서 느낀 건, 잘 나가는 기존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새 사업을 키우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엡손의 발표가 남달리 눈에 들어왔습니다.
엡손은 기존 프린팅과 프로젝터 사업을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체 매출의 약 70%를 차지하는 이 사업들을 안정적인 수익 기반으로 유지하면서, 그 과정에서 쌓아온 정밀기술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겠다는 전략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ROIC입니다. 투하자본이익률(ROIC)이란 기업이 실제로 사업에 투입한 자본 대비 얼마만큼의 이익을 창출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쉽게 말해 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엡손은 2028회계연도까지 ROIC 8% 이상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단순히 외형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본 효율까지 함께 관리하겠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이와 함께 ROE(자기자본이익률)는 10% 이상, ROS(매출이익률)는 8% 이상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ROE란 주주가 투자한 자본으로 기업이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세 가지 수익성 지표를 동시에 목표로 내세운 것은 사업 확대보다 구조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판단했습니다.
엡손은 2026년부터 2028년까지 성장·전략 분야에 총 2800억엔(약 2조4200억원)을 투자하는 동시에 조직과 생산거점, 공급망 재설계를 통해 260억엔(약 2250억원) 규모의 수익 개선도 함께 추진합니다. 투자와 비용 효율화를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입니다(출처: 뉴시스).
정밀기술이 어떻게 산업 현장으로 넘어가는가
제 경험상, 기업이 "기존 기술을 새 분야에 적용한다"고 할 때 실제 연결 고리가 설득력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그런데 엡손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잉크젯 기술이 대표적입니다. 잉크젯 기술이란 미세한 액체 방울을 아주 정밀하게 특정 위치에 분사하는 기술입니다. 프린터에서는 이 기술로 종이에 잉크를 뿌리지만, 제조 현장에서는 회로 기판에 전도성 잉크를 입히거나, 바이오 소재를 정밀하게 도포하는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기술의 이름은 같지만 활용되는 맥락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이크로디바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이크로디바이스(Microdevice)란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초소형 부품이나 센서를 의미합니다. 엡손은 시계 무브먼트를 만들던 세이코그룹 계열사로, 오랜 시간 초소형 정밀 부품을 설계하고 제조해온 이력이 있습니다. 이 기술이 산업용 센서나 의료기기 부품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산업용 로보틱스 역시 정밀제어 기술이 기반입니다. 프린터 헤드가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양의 잉크를 뿌리려면 모터와 센서, 제어 알고리즘이 긴밀하게 작동해야 합니다. 이 정밀제어 역량이 산업용 로봇 팔의 동작 정확도와 직결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기술의 연결 고리가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엡손의 실적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국엡손은 2025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에 227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전년 대비 약 28% 증가했습니다. 특히 프리시전 이노베이션 부문은 잉크젯 솔루션과 프린트헤드 사업 확대에 힘입어 무려 205% 성장을 기록했습니다(출처: 뉴시스).
- 잉크젯 기술: 정밀 액체 분사 → 산업용 소재 도포·회로 제조에 활용 가능
- 마이크로디바이스: 초소형 정밀 부품 → 산업용 센서·의료기기 부품으로 연결
- 정밀제어 기술: 프린터 헤드 제어 역량 → 산업용 로봇 동작 정확도의 기반
- 프린트헤드 사업: 한국 시장에서 205% 성장, 기술 전환 가능성을 수치로 확인
산업용 로봇 확대, 기대와 현실 사이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뉴스를 처음 읽었을 때는 '로봇 사업 확대'라는 표현이 요즘 어느 기업 발표에나 들어가는 수사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한국 시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한국에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배터리, 전자부품 제조업이 밀집해 있습니다. 이 산업들의 공통점은 미세한 오차가 생산 수율과 품질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엡손의 산업·로보틱스 부문이 한국에서 24% 성장한 것은 이런 수요와 무관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다만 제가 이 부분에서 걱정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산업용 로봇 시장에는 이미 화낙(FANUC), 야스카와(Yaskawa), ABB 같은 강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술력이 있다는 것과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제조 현장에서 로봇을 도입할 때는 장비 자체의 성능뿐 아니라 사후 서비스, 부품 수급, 시스템 통합 역량까지 함께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자동화가 가져오는 고용 문제입니다. 반복적이고 위험한 작업을 로봇이 대신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화가 단순히 인건비 절감 수단으로만 활용된다면, 기존 생산직 근로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이 자동화를 도입하면서 동시에 구성원 재교육과 직무 전환을 지원하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35년 산업용 매출 비중 50%라는 목표는 아직 10년이 남아 있습니다. 발표 숫자보다 실제 산업용 매출과 이익이 얼마나 꾸준히 올라오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엡손이 프린터 사업을 접는 건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엡손은 기존 프린팅·프로젝터 사업을 안정적인 수익 기반으로 유지하면서 산업용 사업을 추가로 키우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현재 전체 매출의 약 70%를 차지하는 기존 사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반 위에 산업용 사업을 얹는 구조입니다.
Q. 엡손의 잉크젯 기술이 왜 산업 현장에서 쓰일 수 있나요?
A. 잉크젯 기술의 핵심은 미세한 액체를 정밀한 위치에 정확히 분사하는 능력입니다. 프린터에서는 잉크를 종이에 뿌리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회로 기판에 전도성 소재를 입히거나 정밀 코팅 작업에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술의 원리는 같고, 활용되는 맥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Q. 한국엡손은 왜 28%나 성장했나요?
A. 한국엡손의 2025회계연도 매출 성장(28% 증가, 2276억원)은 주로 잉크젯 솔루션과 프린트헤드 사업의 확대 덕분입니다. 프리시전 이노베이션 부문만 205% 성장했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반도체·전자부품 제조업 밀집 환경이 정밀 기술 수요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입니다.
Q. 엔지니어드 퓨처 2035 목표가 실현될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요?
A. 목표 자체는 구체적이지만, 산업용 로봇 시장에는 이미 강력한 경쟁자들이 존재합니다. 기술력만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는 어렵습니다. 발표된 투자 계획과 수익성 목표가 실제 산업용 매출 성장으로 이어지는지를 매년 실적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 방법입니다.
Q. ROIC, ROE, ROS가 뭔가요? 왜 이게 중요한가요?
A. ROIC는 투하자본이익률로 사업에 투입한 자본 대비 이익 효율을 나타내고, ROE는 자기자본이익률로 주주 자본 대비 수익성을 보여주며, ROS는 매출이익률로 매출 중 실제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의미합니다. 엡손이 세 지표를 동시에 목표로 제시했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 성장이 아니라 수익 구조의 질적 개선에 집중하겠다는 뜻입니다.
결론
이번 엡손 뉴스를 정리하면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건 한 가지였습니다. 기업의 미래 경쟁력은 지금 무엇을 팔고 있느냐보다,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을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엡손은 프린터를 만들면서 쌓아온 잉크젯 기술, 마이크로디바이스, 정밀제어 역량을 산업 현장으로 연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방향 자체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2800억엔의 투자와 2035년이라는 긴 목표 사이에 실제 성과가 얼마나 쌓이는지가 결국 핵심입니다. 화려한 발표보다 산업용 매출 비중이 매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꾸준히 확인하는 것이 이 기업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